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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필드 실험(The Northfield Experiments) : 영국, 1942년 ~ 1948년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윌프레드 비온(Wilfred Bion)’과 ‘존 리크만(John Rickman)’이 2차세계대전 당시 전쟁외상을 겪고 있는 군인들을 대상으로 정신분석학과 집단역동을 활용한 치료를 진행했었다. 비온과 리크만은 이 실험에서 ‘지금 여기의 경험’과 ‘집단내의 인간관계’ 그리고 ‘사회적 환경과 개인과의 관련성’을 강조하였다. 이 실험치료방법이 ‘군의 계급에 따른 권위에 혼란을 주게 될 것’을 우려한 군당국의 반대로 6주 만에 중단되었다.


  그 뒤 폴커스(Foulkes)와 그 동료들이 2차 실험을 진행할 수 있었고, 여기에는 톰 메인(Tom Main)도 있었다. 당시 2차 실험에 참여했던 톰 메인에 의해서 ‘치료공동체(Therapeutic community)라는 용어가 최소로 사용되었다.


민주적 치료공동체(Democratic Therapeutic Community), 영국

  영국에서 맥스웰 존스(Maxwell Jones)에 의해 시작되었다. 맥스웰 존스도 정신분석훈련을 받았고 유명한 정신분석가인 멜라니클라인(Melanie Klein)에게 분석을 받았으나 정신분석에 대해서 양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신분석에 대한 존스의 태도는 자신의 공동체에서 ‘정신역동’ 보다는 ‘사회적 역동’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밀힐병원(Mill Hill Hospital) 1940년 1945년

  2차대전에 참가한 군인들의 전쟁신경증(Shell shock)또는 심장신경증(effort syndrom)을 치료하였다.


  존스는 환자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을 가능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 그와 동시에 그것에 따른 타인의 부정적 반응과 징계에 대한 책임도 피할 수 없음을 알도록 했다. 즉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되 그 결과에 대해 예상하고 책임감을 갖도록 한 것이다.


벨몬트 병원(Belmont Hospital)1947-1959

  1947년 영국의 보건부와 노동 및 연금부는 존스를 수장으로 “산업사회의 만성적 실업자”들을 위한 ‘벨몬트 산업신경증 병동(Belmont Industrial Neurosis Unit IRU)’를 개원하였다. 이 병동의 환자들의 진단적 특성 및 구성은 인격장애환자(personality disorder & psychopaths) 60%, 정신신경증 그룹(psychoneurotic) 20%, 정신증환자(psychotic) 10% 등이었으며 그 외 소수의 신제적 증상으로 오는 환자가 이었다고 한다.


  벨몬트 병원에서 존스는 사회재활병동(Social Rehalilitation Unit SRU)를 운영하며 여기서 민주적치료공동체가 시작되었다. 민주적치료공동체는 이전의 Hill병원에서의 경험들과 전반적인 원칙들이 적용되었다.

  민주적치료공동체(Democratic Therapeutic Community DTC)에서는 “가능한 평등하고 민주적으로! 위계구조는 가능한 적게하고 의사에서부터 환자까지 차별없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적치료공동체의 창시자 맥스웰 존스

▪ 민주적치료공동체의 네가지 핵심원칙

1. 허용 : 거주자들은 처벌받는 위협과 같은 어떠한 부정적 영향 없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2. 민주적 방식 : 모든 거주자들과 직원은 동등한 치료공동체 참여 기회를 가진다.
3. 공동체생활 : 나눔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친밀한 소통과 자유로운 관계.
4. 현실검증 : 거주자들은 동료들과 직원들 등 타인으로부터 비추어진 자신의 진짜모습을 계속해서 직면할 수 있어야한다.

▪ 비온의 노스필드 치료공동체와 맥스웰 존스의 민주적치료공동체 비교

시나논(Synanon)공동체 1958년 ~ 1991년, 미국

  시나논(Synanon) 공동체 : 1958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A.A.멤버였던 찰스 디드리히(Charles E. Dedrich)가 재발을 반복하는 약물 및 알코올중독자들과 함께 자조공동체를 만들었다.

  약물중독자였던 찰스는 동료들로부터 ‘척(Chuck)’이라고 불리었다. 당시 1953년부터 LA에서 ‘익명의 약물중독자들의 모임(NA)’이 시작되었으나 활성화되지 못한 상태여서 척과 같은 약물중독자은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의 모임A.A.’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이들만을 위해 도움을 줄 곳이 마땅히 없었던 것이 시나논이 만들어진 배경이라고 한다.


  척의 공동체에서는 멤버들이 과거 중독자로써의 태도가 반복적으로 보일 경우 동료들이 그 행동에 대한 직면을 하거나, ‘올바른 생활(Right living)’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매일 시행하였고, 서로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제한 없이 표현하게 하는 Game이라는 집단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 Game(synonon game이라고도 불렸음)은 ‘치료공동체의 심장(healt of TC)이라고도 할 만큼 시나논공동체에서는 중요했다. 이 ‘게임’은 후에 Daytop에 가서는 ‘참만남집단(Incounter group)’이라고 불리게되었다. 시나논이라는 명칭은 이 모임에서 매일 진행되는 ‘세미나’와 ‘심포지움’를 멤버들이 발음을 잘못하여 붙혀진 이름이라고 한다. 시나논공동체는 자조집단이면서도 오래된 멤버가 자신들의 회복과 변화의 경험에 대한 권위(authority)를 가지고 신입멤버들에게 역할모델을 통해 회복에 대한 방법을 알려주고 따르게 한다는 점에서 흔히 ‘위계적hierarchycal’ 혹은 ‘개념기반concept based’ 치료공동체라고 불린다.


  당시 시나논치료공동체의 효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무엇으로도 약물을 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약물중독자들이 단약과 회복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집단생활을 하며, 주유소 등지에서 일을 하여 자조적이면서도 자립적으로 회복을 유지해갔다.


시나논의 변질 사이비(cult)화 그리고 해체

  그러나 시나논은 점차 자신들의 성과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시나논은 연간 천만달러의 수입이 발생하게되었다.

  공동체운영에서도 시나논은 처음에는 2년간의 거주재활프로그램을 운영하였지만 사회복귀 후 재발하는 사례가 많아지자 점차 그 기간을 늘여서 나중에는 ‘졸업(퇴소) 없이(never graduate)’ 공동체에 계속 머물기를 권장하는 ‘평생재활(lifetime rehabilitation)개념’ 형태로 변질되어 갔다. 척은 여기에 대해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하기 때문(full recovery was impossible)”이라고 했다.

  시나논공동체의 심장이라고 하는 “Game”이라는 집단프로그램은 너무 공격적인 집단이었고(언어적으로 어떤 공격적 표현도 허용하였다) 멤버나 공동체가 부정적인 행동을 반복하는 경우 벌로써 멤버개인이나 공동체 전체가 삭발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이런 강한 직면은 나중에 Daytop에서 ‘언어삭발식-verbal haircut’으로 완화되기도 했다).



시나논의 삭발식(좌)과 시나논 설립자 찰스 디드리히(우)

  심지어 시나논내에 ‘민병대를 조직하고 무장을 하는 폭력적 집단으로 변해갔다.’ 또한 평생재활공동체 시절에는 시나논 멤버들을 이탈을 막기 위해 멤버들이 서로 감시를 하였는데 1973년에는 탈퇴한 멤버에게 보복으로 폭행하거나, 1978년에는 자신들에 대해 부정적인 방송을 내보낸 NBC방송국의 언론인인 폴 모란츠(Paul Morantz)의 집 우체통에 방울뱀을 넣어 두기도 했다. 폴 모란츠는 이 방울뱀에게 물려 6일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이 사건으로 척은 같은 해 음주를 한 상태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시나논은 이 일로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고 이후 ‘척’없이 운영되다가 1991년 미 국세청이 시나논에 대한 비영리 면세권한을 철회하고 1천7백만 달러의 세금을 과세하자 파산하게 되었고 공식적으로 와해되었다. ‘척’은 이후 재발을 반복하다 1997년 83세에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DAYTOP Village 1963년 ~ 현재, 미국

  미국되어 약물 의 약물중독 재활센터인 DAYTOP Village는 ‘시나논’을 모델로 한 약물중독 치료공동체로서 오브라이언 신부와 정신분석의 데니얼 카스리엘 그리고 ‘시나논’출신의 회복자 데이비드 다이치 3명의 공동창립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 세명의 공동창립자

오브라이언 신부(Monsignor William B O’Brien) 1924 - 2014

  미국 뉴욕시의 성 패트릭 대성당의 본당신부시절 신도의 청소년 아들이 패싸움을 하다가 살인사건에 연루된 것을 돕다가 청소년들의 거리문화 배경에 약물중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약물중독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미국사회에 약물문제가 아주 심각하지만 효과적인 치료법이 없어 약물중독자들이 사회적으로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약물중독을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던 중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약물중독 재활프로그램인 ‘시나논’에 대한 소식을 듣게되었다. 1959년 오브라이언 신부는 당시 뉴욕시 인근에 있던 코네티컷주의 웨스트포트에 ‘시나논’출신의 회복자 데이비드 다이치가 운영하는 공동체를 찾아갔는데 여기서 정신분석가이자 정신과의사인 데니엘 카스리엘을 만난다 카스리엘역시 효과적인 중독회복방법을 찾다가 이날 처음으로 웨스트포트하우스를 찾은 것이었다. 이날 두 사람은 웨스트하우스에서 오래된 약물중독자들이 정말 단약을 유지하며 회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두 사람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캘리포니아 시나논 본부 찾아가 척을 만나고 난 후 시나논 공동체의 약물중독재할효과에 대한 확신을 갖게된 오브라이언 신부는, 뉴욕으로 돌아와 시나논을 지원할 수 있는 기금모금단체‘SOS(Supporters of Synanon)’를 조직하였고 뉴욕시의 많은 약물중독자들을 캘리포나아의 시나논으로 보내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데이탑 스프링우드캠퍼스에 방문해 아침모임에서 거주자와 대화하는 오브라이언 신부

  그러나 시나논이 ‘척’의 카리스마 중심으로 폐쇄적으로 변해갔고 외부 전문가와 연구자들의 비판을 대한 ‘시나논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수용하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1964년 9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뉴욕에 온 척과 만난 오브라이언신부와 데니얼 카스리엘이 함께 논의를 했지만 척과 두 사람은 극단적으로 감정적인 상태가 되어 서로 결별하게 되었다.


  그 만남에서 오브라이언 신부와 카스리엘은 시나논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 중 두 사람이 용납할 수 없는 다시가지에 대한 견해를 척에게 제시하였다.

첫째. 시나논의 목표는 ‘생명이 있는 한 언제까지나(평생재활)’이 아니라, 재활입소기간에 제한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시나논의 방법이 외부의 연구자들에 의해 검정되어야한다.
셋째, 시나논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최소한이라도 수용할 수는 없는가?
넷째, 시나논의 징계처분이 점점 더 거칠어져 간다는 것(삭발, 물구덩이에 던져 넣기 등)
다섯째, 시나논의 본부를 미국에서 약물문제가 가장 많은 뉴욕으로 옮기는 것 권유


데니얼 카스리엘(Daniel Harold Casriel) 1924 - 1983

  카스리엘은 미국의 정신과의사로 콜롬비아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정신분석가 훈련을 받았고, 미국정신분석학회 회장을 지난바 있었다. 카스리엘은 당시 치료하기 거의 불가능한 중독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던 중 시나논을 알게되었다. 시나논에서 그토록 단약하기 어려워하던 심각한 중독자들이 단약을 유지하고 회복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카스리엘은 1962년 7월 직접 시나논본부에 방문하여 1963년까지 공동체에 머무르면서 시나논공동체프로그램을 자세히 관찰하였고 그 경험을 책(So fair a house: The story of synanon)으로 출간하였다. 이후 오브라이언 신부와 함께 많은 약물중독자들을 시나논에 보내고 시나논을 후원하였지만 시나논이 점점 폐쇄적으로 변해감에 따라 시나논과 결별하고, 오브라이언 신부와 함께 DAYTOP 치료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전문가로서 DAYTOP프로그램의 이론적인 부분과 전문적 실천적 부분을 구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데니스 카스리엘 정신과전문의 정신분석가

데이비드 다이치(David Deitch) 1933 -

  DAYTOP공동창립자 중 유일하게 약물중독회복자다. 다이치는 15살에 헤로인을 사용하는 것으로 약물중독자가 되었다고 한다. 십대부터 교도소와 병원을 전전했고 여러 가지 치료를 받았지만 약물을 끊을 수 없었고 재발과 범죄와 교도소를 반복했다고 한다. 1961년 다이치는 원래살고 있던 뉴욕을 떠나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 있는 시나논’으로 치료를 받을 갔다.


다이치는 시나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곳에는 권위적인 지도자와 전과자, 사기꾼, 범죄조직원과 유명한 재즈음악가, 자유로운 여성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내밀한 사연들도 함께 나누며 모든 것을 함께 했다. 우리 모두는 바닥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이것은 치료프로그램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놀라운 공동체였고 모두는 그 마법에 헌신하였다.”


다이치는 시나논이 폐쇄적인 공동체가 된 후에 많은 시나논 출신의 회복자들이 미국내의 중독재활치료공동체를 설립하는데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DAYTOP이 그 첫 번째가 되었다고 했다.



시나논 출신의 회복자 데이비드 다이치

데이비드 다이치는 데이탑에 처음 왔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처음 데이탑에 왔을 때 거기에는 공동체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35명의 약물전과자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과 16시간 동안의 모임을 통해 그들의 행동을 바꾸는 과정을 가졌다. 나는 그들이 본질적으로 공동체에서 사용하고 있는 약물과 숨겨놓은 장소들을 모두 솔직히 밝힐 수 있도록 하였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어느 정도 ‘뉘우침’을 가질 수준까지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만약 당신들이 여기에 머무르고 싶다면 잘못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라고 했다. 그때 우리는 ‘삭발의식’의 효과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직접 거주자들 한사람 한사람의 머리를 모두 깍아주었다. 그렇게 ‘데이탑 오두막(DAYTOP Lodge)’의 시작이었다.”


데이탑 이후

  1965년에서 1970년 사이의 뉴욕은 중독치료공동체가 설립되고 활성화 되던 시기였는데, 당시‘매스웰 존스’에게 민주적공동체훈련을 받은 정신과의사 에프런 라이미레즈박사가 뉴욕의 중독정책 책임자(Drug czar)로 오면서 중독치료공동체의 과학화를 주장했다. 그는 당시 뉴욕에서 헤로인 중독치료에 관심이 있는 핵심인사들과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는데 여기에는 피닉스하우스(Phoenix House) 창립자인 미치 로젠탈(Mitch Rosenthal)과 오딧세이하우스(Odyssey House)의 창립자인 쥬디 덴센 거버(Judy Densen-Gerber) 그리고 사마리탄 빌리지(Samaritan Village)가 만들어지는데 많은 도움을 준 젊은 사회복지사도 함께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당시 많은 중독재활치료공동체가 생겨났고, DAYTOP의 졸업생들은 미 전역의 새로 세워지는 치료공동체로 가서 그들을 도왔다. 데이탑은 이후 미전역과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에 중독재활치료공동체가 세워지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14년 설립자인 오브라이언 신부의 사망이후 재정적인 문제 등으로 축소 운영되다가 2015년 말 사마리탄 빌리지에 병합되어 ‘사마리탄 데이탑 빌리지(Samaritan Daytop Village)’가 되었다.


민주적공동체와 개념적공동체의 통합노력

  민주적치료공동체의 창시자인 맥스웰 존스와 위계적치료공동체의 지지자인 조지 딜리언 등은 서로 많은 교류를 하면서 두 타입의 공동체의 장단점을 분류하며 통합 및 성장하는 과정을 가졌다. 브릭스(Briggs 1993, p. 32)는 1960년초 맥스웰존스가 캘리포니아의 스탠포드대학에 사회정신의학교수로 방문했을 때 ‘시나논’에서 찰스디드리히와 만남을 가졌다고하며, 여기서 존스는 척과 서로의 관점에 대해 나누고 싶어 했다고 하였지만 두 사람모두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브릭스는 이 만남에서 존즈가 시나논프로그램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고, 심지어 ‘척’에게 시나논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신의 방식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만남은 아주 재앙적이었고 몇 마디 나누지 못하고 끝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위계적치료공동체가 시나논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실존주의와 인간중심주의 심리학을 받아들이며 독립적으로 성장해나가자 존스는 두 치료공동체의 전통을 연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고 두 타입의 치료공동체 통합에 열성적인 지지가가 되었다(Jones, 1979, 1984 & 1984b). 1970년대에 존스는 자주 약물회복 치료공동체들의 컨퍼런스개최에 초대되었으며 그곳에서 딜리언De Leon과 오텐버그Ottenberg와 같은 개념기반의 치료공동체 지지자들과 함께 존경과 우정을 발전시켜갔다. 존스는 또한 미국 중독저널들에 두 공동체의 통합의 가능한부분에 대해 언급한 많은 보고서를 게재하였다(Jones, 1979, 1984 & 1984b). 오늘날 위계적공동체에서는 민주적공동체의 ‘사회학습의 원칙’이 개념기반공동체에 완전히 받아들여지고 있다. 딜리언(De Leon 2000, p. 70)은 존스의 말을 인용하여 ‘TC에서 모든 배움은 사회적 상호작용, 경험, 역할들을 통해서 일어난다.’ 라고 했고 계속해서 ‘이러한 가설은 공동체가 기초교사로 활용되기 위한 토대가 된다. TC에서 학습은 참여와 행동을 통해서 일어난 경험적인 것이며,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역할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라고 했다. 존스는 ‘프로그램에 입각한 치료공동체가 약물에 중독된 사람에게 훨씬 더 효과적인 라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언급(1984, p. 25)하면서 ‘개념중심 치료공동체’를 항상 수용하는 태도였다(see also Kooyman, 1993).


민주적치료공동체와 위계적치료공동체의 특징간의 관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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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치료공동체
(DTC)
위계적치료공동체
(HTC)
지향과 통합
사회학습
(Social learning)
행동의 변화
(Behovioural modification)
범법자 등 반사회적문제를 가진 대상자들에 대해서는 민주적공동체에서도 어느 정도 행동지향적 접근을 한다. 또 오늘날의 위계적공동체에서는 사회학습을 중요한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다.
허용
(Permissiveness)
모델링
(Modeling)
민주적공동체에서 허용은 거주자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태도와 행동을 개방하는 것이 징계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여 자신을 정직하게 개방하게 만든다. 그러나 거주자들은 자신에 언행에 대해 책임을 직면하는 것이 때로는 징계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위계적공동체에서의 오래된 멤버들이 역할모델로서 이러한 고통을 성숙하게 감내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후임거주자들을 격려 하게된다.
민주적
(Democracy)
위계적
(Hierarchy)
민주적공동체는 자유와 책임 있는 행동을 지향한다. 공동체를 떠나는 자유가 있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있다. 위계적공동체에서는 이러한 자유와 책임의 수준이 ‘거주자 개인의 공동체내의 위치’로 나타난다. 보다 책임감 있다고 인정받은 거주자가 좀 더 많은 자유를 가진다.
공동체주의
(Communalism)
방법으로서의 공동체
(Community as method)
공동체가 치료의 도구이며 공동체를 통해서 치료를 만들어 같다는 의미이며, 두 가지 개념모두 공동체내에서 거주자들이 ‘자조’를 치료적 도구로 사용하게된다. 문제가 있었던 사람들이 회복이 되면서 공동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더 큰 사회에서도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게 된다. 특히 위계적공동체의 졸업생은 계속 공동체가족으로 남아있으면서 단중독과 회복의 역할모델이 될 것을 약속하게 된다.
현실검증
(Reality testing)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하기
(Act as if)
현실검증은 ‘진실의 거울’로서 거주자의 자기이미지와 동료들의 지각 사이의 본질적인 직면과 모순에 위치한다. 위계공동체에서도 ‘직면의 거울’은 의미와 평가체계에 의해 반영된다. 위계공동체에서 거주자는 ‘마치 아무문제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야만 하는데 이것으로 인한 높아진 긴장은 집단상담에서 풀어질 수 있다. 위계공동체의 핵심집단인 참만남집단에서도 거주자들은 ‘내적으로 변화된 것처럼 행동해야 되지만’ 그것을 그렇게 자발적으로 실행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거주자들의 자기이미지가 깨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성격구조에까지 손상을 입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형상에 대해 최근의 경향은(특히 유럽의 전문적이고 정신분석적인 경향에 영향을 받은 경우) 내적직면(encounter)이 보다 대화의 형태로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

2. 카프치료공동체 역사

  카프치료공동체의 역사는 구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는 국내 음주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가 음주의 사회적 폐해에 개입하려는 의지에 의해1997년 대한주류공업협회(현 한국주류산업협회)가 주류소비자보호사업의 일환으로 건전음주문화정착 및 알코올문제 예방, 치료사업을 시행하기로 함에 따라 2000년 4월에 설립된 재단법인이다. 법인설립 후 2001년 서울시 마포구에 ‘서울알코올상담센터’를 개소하였고, 2004년에는 경기도 일산에 알코올중독전용 카프병원을 개원하였다.

  치료공동체는 그 후 2005년에 와서 1월에 각각 주간재활센터인 ‘카프이용센터’와 ‘남성거주시설 감나무집’을 개소했고 이듬해 2006년에는 1월에 ‘여성거주시설 향나무집’을 그리고 2007년 1월에는 남성전용 Halfway house인 ‘카프 중간집’을 개소함으로써 체계를 갖추었다. 당시 뉴욕의 데이탑에서 수개월간의 인터내셔널 훈련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차진경이 감나무집의 시설장으로 ‘치료공동체만들기’에 앞장섰고 김용근, 한승일 등이 함께 동참하였다. 이 후 양순승, 이은숙, 이한숙 등의 직원들이 후발로 데이탑 인터내셔널 연수를 받고 와서 개념기반 치료공동체가 국내에 도입되어 정착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모법인의 설립주체이던 한국주류산업협회가 철수하게 됨에 따라 수년간의 고통 끝에 ‘천주교서울대교구’에서 재단을 이어받게 되었고 법인명을 ‘한국중독연구재단’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설립 된지 15년 차가 된 카프치료공동체는 그동안 미국에서 들여온 치료공동체모델은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치료공동체에서 추구하는 단중독과 회복의 본질을 지켜오며, 많은 알코올중독자들이 ‘알코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회복하는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2005

01월20일 카프치료공동체 감나무집, 남성거주자 대상으로 거주형 치료공동체 운영함

04월          카프이용센터, 주간치료공동체인 참사랑공동체 운영함.


2006

02월          카프여성거주시설 향나무집, 여성알코올중독자를 대상으로 거주형치료공동체 운영함


2007

01월          카프치료공동체 둥지(중간집) 남성거주자들을 대상으로 낮에는 취업생활, 밤에는 치료공동체 운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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